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을 보고 당시 관객들이 열차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며 극장 밖으로 달아났다는 풍문은 아직도 전해지고 있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영화가 주는 강렬함은 스크린에서 관객석 쪽을 향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스크린 앞으로 다가가 그 너머를 꿈꾸고 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6년째 XR 작품을 선보이며 영화 혹은 현실의 경계를 확장해왔다. 여기서 XR(Extended Reality)은 확장현실을 뜻하며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등의 기술을 아우르는 용어다.

2021년 XR 부문 ‘비욘드 리얼리티(Beyond Reality)’ 섹션은 작년과 동일한 장소인 인천국제공항 제1교통센터에서 선보인다. 올해는 공식 선정작과 더불어 ‘바오밥 스튜디오 특별전’, 칸 XR 뉴이미지 영화제 공동주최로 진행되는 ‘XR3’, ‘BIFAN x Unity Short Film Challenge’ 수상작까지 만나볼 수 있다.

상영작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주제는 없다. 각양각색의 이야기를 VR이라는 형식 안에서 체험하는 것이 이 섹션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띄는 작품들은 ‘잊혀져 가는 것’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는 VR을 통해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테마이기도 하다. <미싱 픽처스> 시리즈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미싱 픽처스: 챠이밍량>은 잊혀 가는 기억을 VR로 복원하는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위대한 감독들이 여러 이유로 제작에 실패한 작품을 만들 기회를 제공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아벨 페라라 감독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의 주인공은 차이밍량 감독이다. 차이밍량은 자신의 VR 작품 <The Deserted: VR>(2017)에서는 감독으로서 카메라 뒤에 있었다면, 이번 작품에선 카메라 앞에 서게 된 셈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차이밍량은 보이스 오버로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에 대해 내레이션 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영화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할아버지와의 추억이다. 할아버지를 따라 차이밍량이 도착한 곳은 영화관이다. 이후 영화관은 폐허가 된 곳으로 변한다. 그곳에 현재의 모습을 한 차이밍량이 객석에 홀로 앉아 스크린을 바라본다. 그의 기억을 토대로 완성된 이 영화 속 이미지의 감촉은 초롱불과 같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초롱불은 잊혀질 것 같은 그의 옛 기억과 닮아 있다. 차이밍량의 기억이 극장 스크린으로 집결된다는 점에서 이 영화 역시 영화에 관한 영화이며 그런 이유에서 그의 작품 <안녕, 용문객잔>을 연상시킨다.

관객은 VR이란 가상의 영화적 공간에 위치하기에 스크린으로 바라봤던 것보다 이미지의 감촉을 좀더 체감한다. <미싱 픽처스: 챠이밍량>이 잊혀 가는 기억에 관한 복원이라면, <Speak to Awaken: Ep.2 쿠순다>는 잊혀 가는 언어에 관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로 86세의 ‘릴 바하더’와 15살 손녀 ‘헤마’가 등장한다. 고립된 지역에 사는 이들이 쓰는 쿠순다어는 다른 언어들과 교류하지 못한 채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 멸종 위기에 처한 쿠순다어를 잇는 사람으로 손녀 헤마는 마을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녀는 쿠순다어로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이전까지 쿠순다어로 된 노래가 없었다. 이 노래를 집 앞마당에서 할아버지께 불러드리는 장면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영화에서 할아버지 릴 바하더의 옛 기억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숲에서 살아온 할아버지의 옛이야기에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나뭇잎의 바스락거리는 감촉이다. 그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는 등장했다가 페이드 아웃되기를 반복한다. 이후에 영화는 피어나고 시들고 떨어지는 나뭇잎과 대비되는 나무를 등장시킨다. 뿌리를 내리고 우직하게 서 있는 나무 이미지는 쿠순다어를 보존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지로도 읽힌다.

앞서 두 편의 영화는 관객이 VR 기기를 장착하고 고개를 좌우로 옮기는 정도로 영화적 공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문종훈 감독의 <가족의 시간>은 관객의 좀더 능동적인 관람을 요구한다. 어린 시절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병철이네 가족. 아버지는 부인을 살리기 위해 연구를 시작하고, 실험 도중 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기계에서 사라진다. 병철은 아버지를 복원시키기 위해서 아버지의 연구를 계속 이어나간다. 우연한 계기로 과거에서 아버지가 소환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영화의 내용은 타임 패러독스에 관련된 것으로 익숙한 주제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진부함을 흥미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360도 VR 형식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가족이 함께였던 연구실은 폐허에 가까운 텅 빈 공간으로 등장한다. 그곳에 어느새 이미지가 하나둘씩 생겨난다. 관객은 360도 회전하는 의자에 앉아 아버지와의 추억으로 물드는 공간을 그 광경을 보게 된다.

이처럼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인물의 기억을 되살리고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게 하는 것은 VR 영화의 특화된 장점이다. 김진아 감독은 여기에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장르 미학까지 녹여내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동두천>과 <소요산>은 미군 위안부 VR 삼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연작의 첫 번째 작품인 <동두천>은 1992년 주한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던 기지촌 성 노동자 여성에 관한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다. 영화는 동두천 번화가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그러다 어느새 한 여성이 지나간다. 그 여성의 구두 소리를 부각하여 집중하게 만든다. 점프 컷으로 벽면을 마주하게 되고 좁고 긴 골목길에 관객이 위치한다. 골목 끝 어두움을 뚫고 한 여성이 나타나고 관객을 통과하며 지나가는데 이때 관객은 다소 무서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순간부터 관객은 성 노동자 여성을 기다리는 손님으로 하나의 시점을 더 갖게 된다. 다음 장면은 한 여관방이다. 어지럽혀진 방안에 우두커니 관객은 서 있고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이곳에서 관객에게 방안을 구석구석 살피게끔 만든다. 눈치 챌 새도 없이 이미 어느새 방안에 무언가가 퍼져있음을 직감하는 때가 온다. 영화는 이렇듯 단서를 한꺼번에 보여주지 않고 관객이 방안을 살피며 단서를 찾는 일종의 방 탈출 카페처럼 연출을 선보인다.

김진아 감독의 신작인 <소요산> 역시 같은 방식을 활용한다. <동두천>보다 소리의 효과를 배가시켜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살린다. 1970년대 초 설립된 기지촌 여성들을 감금하고 치료했던 ‘몽키 하우스’를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의 보이지 않은 비극적인 흔적을 복원시키는 과정이 흥미롭다. 관객은 각각의 공간에서 주위를 돌아보게 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순간, 방금 전까지 없었던 물건들이나 장비들이 놓인 것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 영화는 인물을 등장시키지 않은 채 몇 가지 이미지와 사운드로 빈 공간에 서사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연출을 선보인다. 점프 스케어로 인물이 갑자기 등장할 것 같은 긴장감을 계속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영화는 공포 장르로서도 손색이 없는 연출을 선보인다. 영화 <여고괴담>을 연상시키는 긴 복도에 관객이 위치해 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흐르는 비에 구슬픈 여인의 울음소리도 겹치면서 관객은 이들의 슬픈 감정과 무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김진아 감독은 단편 다큐멘터리 <동두천>으로 제7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VR 스토리상을 수상하고,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에서 VR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 신작 <소요산>도 전작과 같은 방식을 소구하지만 사운드로 서사를 적극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VR 스토리텔링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김진아 감독의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진우, 2021년 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