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끝난 제19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동두천>은 가상현실(VR) 작품이다. 관람객들은 차례로 극장에 들어가 VR 전용 기어를 쓰고 기괴하고 음산한 영상을 목격해야 했다. 여기엔 새로운 영상 테크놀로지가 동반하곤 하는 어떠한 시각적 쾌감도 없다. 어느 기지촌 여성의 끔찍한 삶, 그를 통해 드러나는 여성 육체에 대한 학대, 한·미관계의 모순이 나타날 뿐이다.
김진아 감독(44·사진)이 <동두천>의 모티브가 된 ‘윤금이 피살 사건’을 접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그는 피해자의 시신 사진이 공개된 이후, ‘재현의 윤리’에 대해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그 집 앞>, 하정우와 베라 파미가가 주연한 극영화 <두번째 사랑> 등 다수의 장편을 내놓으면서도 ‘윤금이 피살 사건’은 김진아의 못다 한 프로젝트였다. 김진아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 왜 ‘윤금이 사건’을 VR로 찍었나.
“내 작품의 화두는 언제나 여성의 몸이었다. 영화는 원래 관음적 매체고, 재현 자체가 폭력이다. 전쟁같이 끔찍한 일도 팝콘 먹으면서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화다. 반면 VR은 보지 않고 체험하게 한다. VR을 보면서 즐길 수는 없다. VR이라면 기지촌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재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VR과 영화의 연출상 차이는 무엇인가.
“영화의 기본 단위는 프레임이지만, VR에는 프레임이 없다. 영화는 연출자가 담고 싶은 세계만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프레임도 중립적이지 않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무언가가 배제된다. 하지만 VR은 그렇지 않다. 장소를 정해 카메라를 가져다 놓으면 ‘끝’이다. 360도가 찍히니까, ‘액션’ 하면 감독과 촬영감독 모두 미리 눈여겨두었던 골목이나 전봇대 뒤로 바퀴벌레처럼 흩어져 몸을 숨기기 바쁘다(웃음).”
- 기술은 산업, 엔터테인먼트에 먼저 적용되곤 한다. VR을 이용한 성산업 같은 것이 분명 번창할 것 같다.
“신기술은 돈이 든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팔리는 것은 성과 폭력이다. VR도 체험을 중시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VR은 인터넷과 같지 않을까. 양날의 칼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위험천만하지만 잘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VR로 얼마든지 인류애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얼음 위에서 미끄러지는 북금곰이 돼 본다면, 주변의 숲이 벌목되는 아마존 나무가 돼 본다면 어떨까. <동두천> 제작 소식을 듣고 재직 중인 학교(UCLA)의 ‘다양성 평등 포용 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VR의 활용 가능성을 본 것이다. VR은 한마디로 타자와 완전히 공감하는 경험을 유도하는 매체다.”
-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미장센의 영화는 사라질까.
“당분간 사라지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스토리텔링이 먹히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이야기 구조도 점점 게임의 구조를 닮아 간다. 기승전결 없이 첫째 판, 둘째 판, 세째 판을 이겨 나가는 식이다. 언젠가 영화는 지금의 클래식 음악처럼 될 것 같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 사라지진 않지만, 새롭게 만드는 사람은 적은 그런 장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