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8일부터 열흘간 개최된 제25회 부천국제영화제(BIFAN)의 테마는 '이상해도 괜찮아(Stay Strange)'였다. 누군가에겐 낯설고 수상한 이야기지만 굳건히 키워나간다면 결국 그 재능이 BIFAN을 통해 활짝 꽃을 피울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올해 BIFAN의 '비욘드 리얼리티(Beyond Reality)' 전시는 철저한 방역 수칙 준수와 사전 예약제를 통해 관람 인원을 축소한 가운데 총 3067명의 관객이 영화의 새로운 현실을 체험했다. 전시 작품은 바오밥스튜디오 특별전, XR3 한국 전시, BIFAN×Unity Short Film Challenge 수상작과 한국문화재재단이 제작한 실감 콘텐츠 등 총 80여 편이었다.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3부작, 제2편 <소요산>
 
'비욘드 리얼리티'를 통해 공개되었던 김진아 감독 VR 다큐멘터리 <소요산>이 제78회 베니스국제영화제 VR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소요산>은 이번 베니스영화제 VR 경쟁 부문에 선정된 유일한 한국 작품이다. <소요산>은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 <동두천>은 2017년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VR스토리상을 수상한 바 있다. '미군 위안부'라는 표현에 대해 김진아 감독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아래와 같은 설명을 올려두었다.

"'미군 위안부'란, 주한미군기지 주변의 기지촌에서 한국 정부의 주도하에 미군을 상대해야 했던 성 노동자 여성들을 뜻한다. '위안부'라는 용어는 전통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군을 상대했던 성 노예 여성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 용어는 국가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외국군을 상대하는 강요적 매춘을 통틀어 칭하는 용어로 점차 상용화되고 있다. 2018년 서울고등법원은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며 배상을 촉구했으며 판결문에서 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미군 위안부' 시리즈의 첫 작품인 <동두천>(2017)에서 김진아 감독은 1992년 미군 병사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고 윤금이씨 사건을 재조명했다. 두 번째 작품인 <소요산>(2021)은 1970년대 초, 성병에 감염되었다고 추정되는 기지촌 여성들을 감금하고 치료했던 이른바 '몽키 하우스'라는 공간을 재현한다. 한국전쟁 이후, 연평균 2만 5천여 명의 미군이 국내에 주둔해왔다. 주한미군 기지의 크기는 한때 남한 국토 가용면적의 17.7%에 육박했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미군 기지 주변에 매춘과 윤락 시설을 갖춘 96개의 기지촌을 설립하고, 누적 약 100만여 명의 여성을 성 노예화하는 일에 협력해왔다.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 한국 정부는 미군 내 성병률을 낮추라는 미 정부의 압박 아래 기지촌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의무화하고, 검사 결과를 가슴에 상시 착용하도록 했다. 2주마다 의무적으로 진행된 검사에서 발병이 의심되는 여성은 물론이고, 번호표를 달고 있지 않은 여성들, 미군에 의해 성병 전파자로 지목된 여성들은 강제로 몽키 하우스로 이송되었다. 몽키 하우스의 정체는 검사를 통과하지 못하거나 거부한 여성들을 강제로 격리하는 '낙검자 수용소'였던 것이다.

수용소에 감금된 여성들은 테스트도 거치지 않은 고용량의 페니실린 투약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겪어야 했다. 투약과 치료에 대한 공포로 수용소를 탈출하려던 여성이 옥상에서 뛰어내려 사망하는 일도 발생했다. 몽키 하우스라는 별칭은 수감된 여성들이 창문에 매달려 내보내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모습이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들과 흡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낙검자 수용소는 2004년까지 운영되다가 중단되었는데 당시 건물은 남아있다.


공간에 새겨진 통곡과 절규를 듣다
 
<소요산> 영상의 첫 장면은 소요산을 배경으로 흉물스럽게 서 있는 낡은 건물의 외경이다. 건물에 얽힌 히스토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저 오래된 건축물에 불과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곳에서 벌어진 야만의 시간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선뜻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렵다. 복잡한 마음으로 건물을 쳐다보고 있으니 잠시 후 건물 안으로 화면이 전환된다.

한낮인데도 빛이 잘 들지 않는 내부는 어두컴컴하다. 처음 도착한 장소는 공동 침실이다. 군대의 내무반과 비슷한 구조의 침상 위로 베개들이 빼곡하게 일렬로 놓여있다. 그 중 한 자리에만 검은 담요가 펼쳐져 있다. 마치 방금 누군가 잠에서 깨어 방을 나간 듯한 모습이다. 다음 장소는 공동 샤워장과 세면대, 문이 없는 화장실이다.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며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세면대엔 누군가 사용한 듯한 칫솔과 세면 도구가 나타난다.

방금 전 침실에서 나와 세수를 마친 누군가의 동선을 따라가듯 다음 장소는 식당으로 전환된다. 빈 공간에서 재현되는 식당 이미지는 테이블과 의자, 1인분의 식사가 담긴 식판 등이다. 평범한 일상처럼 흐르던 누군가의 시간은 산부인과 진료 의자와 피 묻은 기기들이 재현된 치료실에서 전복된다. 이곳에 감금된 누구도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들은 피해 여성들의 증언과 현장에서 발견된 하루 일과표를 토대로 재구성된 것이다. 김진아 감독은 이곳에 남겨진 역사를 '공포와 수치'라고 표현한다. 국가 권력에 의해 훼손된 여성들의 통곡과 절규, 공포와 두려움이 수용소의 구조와 잔해들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어둠이 내린 복도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관객은 빗소리 사이로 흐느끼는 여성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그녀의 울음은 처음엔 작은 흐느낌이었다가 차츰 굵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커다란 통곡으로 바뀐다.

감독은 오래 전 누군가의 아픔을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한다. 이 공간을 살다 간 그녀들의 시간이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도 흐르고 있음을 관객이 직접 체험하도록 안내한다. 포스터 속 여성이 마지막으로 내뿜는 긴 담배 연기는 누구도 구원해주지 않는 외로운 생의 끝자락에서 스스로에게 보내는 그녀의 마지막 숨이다. 천천히 옥상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더욱 처연하게 만드는 것은 함부로 찢겨진 그녀의 치맛자락이다. 같은 공간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본 관객은 몽키 하우스의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된다.


김진아 감독은 <소요산>의 제작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소요산>이 몽키 하우스라는 공간을 기록 및 보존하는 동시에, 한미 양국의 사이에서 침묵을 강요당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김진아 감독 제작노트 중에서)  

VR 다큐멘터리는 감독이 재현한 공간 속에서 관객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탐색하고, 공감하는 스토리두잉 콘텐츠다. 감독은 관객과의 일대일 소통을 통해 동시대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건과 현장, 흔적과 목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관객들이 동일한 경험과 느낌을 체험하지 않더라도 가상현실 속에서 마주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기억의 윤리에 대해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기억만이 현재의 폭을 두껍게 만들어준다. 어떤 사람에 현재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겠지만, 또다른 사람에게는 연쇄살인의 그 참혹함이, 유신시대의 압제가, 한국동란의 비극이, 식민지 시대의 몸부림이, 제 양심과 희망 때문에 고통당했던 모든 사람의 이력이, 모두 현재에 속한다. 미학적이건 사회적이건 일체의 감수성과 통찰력은 한 인간이 지닌 현재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에 의해 가름된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중에서)

김진아 감독의 <소요산>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환기이자 공권력에 희생된 여성들의 삶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촉구하는 콘텐츠 액티비즘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정아, 2021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