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시차위에 빚은 환시적 풍경, 미군 위안부 VR 3부작 특별전 참관기

한국영상자료원이 첫 VR 특별전을 개최했다. 10월24일부터 11월18일까지 열리는 ‘당신의 침묵을 비추는 거울-김진아 감독 VR 특별전’은 미군 위안부가 머물다 떠난 자리를 감각하게 하는 김진아 감독의 단편 3부작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을 시네마테크KOFA 로비 전시 공간에서 상영한다.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 XR(Extended Reality, 확장현실) 형태로 그의 작품을 두루 경험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김진아 감독의 뉴미디어 작업은 작금의 게임 산업이 잠식하려는 가상의 스펙터클이 아닌 현실을 재감각하는 영역으로 관객을 인도한다. 2017년 선보여 호평받았던 <동두천>부터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을 거쳐 한국 프리미어로 상영된 <아메리칸 타운>까지 세 VR 작품을 연속 관람한 경험을 토대로 김진아의 영화가 보존한 장소, 복원한 존재들과 접속한 날의 기록을 전한다.


<동두천> VR 3부작 / 2017

“초점이 맞나요?” 전시장 스탭이 VR 헤드기어를 머리에 씌워주며 물었다. 약간 흐릿한 느낌이 들어 두손으로 고글을 받친 뒤 높이를 살짝 조정했더니 그제야 시야가 선명해졌다. 스탭은 내 움직임에 맞추어 헤드기어가 눈에 좀더 밀착되도록 조여주었다.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관람의 질을 결정하는 중대한 초기 세팅이다. 이어 스탭이 귀를 헤드폰으로 덮자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었고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낮의 유흥가 골목에 떨어졌다. 김진아 감독의 미군 기지촌을 다룬 첫 단편영화인 <동두천>은 잠시 이 낯선 장소를 둘러보도록 관객을 철저한 이방인의 상태에 내버려둔다. 두리번거리며 탐색하는 동안 VR이 주는 약간의 어지럼증에 적응할 때쯤 밤이 찾아온다. 불빛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다니는 한 여자의 구두 소리가 주의를 끌지만 정작 그의 실체는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구인지 모를 한 사람을 관객 스스로 찾아 헤매도록 유도하는 영화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나를 점점 더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내몰았다. 사방을 자유자재로 둘러볼 수 있다는 점에서 VR은 관객의 권능감을 극대화하는 매체로 여겨질 수 있지만, 2D영화에서는 자연히 확보되었던 픽션과 관객 사이의 안전거리가 좁혀진다는 점에서 오히려 철저히 무방비 상태인 것 같은 경험 역시 가능하다. 마침내 어둠 속에 갇혀 골목 너머의 작은 틈새밖에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사이로 발소리의 주인공이 천천히 내게 다가올 때, 나는 극장에서 공포영화에 대응할 때처럼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내 무릎이 보이긴커녕 여전히 동두천 어느 골목의 시커먼 바닥만 보일 뿐이었다.

<동두천>이 호러적이라는 단평을 기지촌 여성이 내몰린 사회적 참상에 대한 은유적 수사인 줄로만 알았던 관객들은 이 무렵 대부분 세간의 반응이 그저 솔직한 수사였음을 깨닫는다. 다가온 여자는 내 몸을 통과해 지나쳤다. 나는 유령인가? 겁에 질린 채 질문해본다. 그리고 여자가 나를 통과했으므로 그가 지나쳐간 방향으로 시야를 돌린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자 역시 뒤돌아서서 나를 한동안 빤히 바라본다. 서로의 얼굴이 거의 맞닿을 듯이 몸을 내쪽으로 구부린 채로. 이윽고 무언의 허락을 따라 그 길로 여자의 방에 이끌려 들어간다. 그 방은 여자가 죽은 방, 이불 속에서 서서히 피가 흘러나와 누런 장판을 뒤덮는 방이다. 관람자는 어느덧 공중에 뜬 완연한 유령의 시점으로 부재하는 시신의 흔적만을 목격하게 된다. 이상한 것은 죽음이 명백해진 이 시점에 다시 구두 소리가 들려온다는 사실이다. 대다수의 관람객들이 소리가 나는 방향인 열린 문틈의 어둠을 향해 시선을 두게 될 테지만, 비극을 앞에 둔 순간조차 물색없이 두리번거리기 좋아하는 (나와 같은) 죄 많은 관음자들은 잠시 쪽방 거울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유령과 마주하게 된다. 어느 쪽을 보고 있든 감히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외롭고 참담하기는 매한가지인 이 밤은 1992년 자신의 방에서 피살된 동두천 미군전용 클럽 직원 고 윤금이씨의 것이다.


<소요산> VR 3부작 / 2021

“어지럽지 않으신가요?” <동두천>이 끝나자 스탭이 다가와 <소요산>을 이어서 볼 것인지 재차 확인했다. 아마도 잠시 휴식을 선언하거나 물러나는 관객들도 있는가보다. 나중에 김진아 감독에게 듣기로 어떤 관객들은 <동두천>의 라스트 시퀀스에서 방바닥에 피가 낭자할 무렵 “자기도 모르게 발을 든다”고도 했으니. <소요산>의 슬픔은 이내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1970년대 초, 주한 미군의 성병 감염률을 낮추기 위해 미국이 기지촌 정화를 요구하자 정부는 소요산 아래에 미군 위안부 여성들을 고립시켜 검사·치료하는 낙검자 수용소를 만든다.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 성착취 문화가 쌓아올린 동두천의 불야성과는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어둡고 축축한 폐허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2021년 촬영 당시 “과거의 잔해는 물론 출처를 알 수 없는 쓰레기 더미가 무릎까지 쌓여 있던” 공간 위로 김진아 감독은 과거의 이미지를 중첩시켰다. 군용 침상, 문 없는 샤워장, 수술대 위에 디졸브 형태로 누군가의 흔적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머물다 사라지는 존재가 소리로만 들려오기도 한다. 모든 쇠락한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쓸쓸함을 자아내지만 <소요산>은 이미지의 감각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폐허 이전에 있었던 산 존재들을 각인시킴으로써 쇠락의 시간 안에 축적된 역사를 감지하게 만든다.<동두천>의 정처 없는 발소리는 <소요산>에서 귀곡성으로 바뀌고, 울음소리는 곧 거대한 소나기로 번져간다. 1970년대 낙검자 수용소의 하루 일과표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우는 시간을 <소요산>은 허락하고 있다.


<아메리칸 타운> VR 3부작 / 2023

한, 공포, 수치가 얽혀 있는 내밀한 방들을 거닌 나는 <동두천>의 첫 신이 그랬듯 다시 대낮의 황량한 거리로 불려나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이번엔 1969년 군산 미군 공군기지 인근에 설립된 아메리칸 타운이 그 무대다. 김진아 감독 영화 속 여성들은 2018년에 서울고등법원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낙검자 수용소 운영에 관해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미군 위안부라는 명칭으로 공식화되었다. 앞선 두 작품에서 시차와 환시를 통해서 비로소 발생하는 역사적 리얼리티를 구축한 김진아 감독은 3부작이 완성되는 마지막 작품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이어간다. 관람객이 마주하는 아메리칸 타운의 2022년 촬영 당시 풍경이 어떠한가 하면, 한마디로 텅 비어 있다. 그러나 해가 지기 시작하자 닫힌 가게, 비어 있는 거울, 부서진 테이블에 시끌벅적한 옛 이미지들이 일렁인다. 하나의 가상 세계에 몰입하고 있지만 시공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는 느낌은 3부작을 연속 관람할 때 단일 작품이 의도한 것 이상으로 증폭된다.

VR영화에 흔히 수반되는 동사는 ‘체험한다’이고 김진아 감독의 영화에서 이 체험의 의미는 종종 피해자-되기, 유령-되기라는 느낌으로 풀이되기도 하지만 김진아 감독은 “그런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며 손사래쳤다. <동두천>에서 <아메리칸 타운>까지 다 보고난 뒤의 내 감상은 이 VR 3부작이 현재에서 발생하는 시차나 타자의 한계를 지우지 않기에 유의미한 초현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은 감히 당신이 되어본다는 착각이나 유령 됨의 슬픔이 아니라, 우리가 고수해온 너무 오랜 침묵의 무거움을 감당하는 일일 것이다.

김소미, 2023년 11월 16일

For more information, please click here for the original sour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