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실용화되면 새로운 세상 열릴 것…인류 소통에 기여"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네온사인 불빛도 꺼져가는 동두천 새벽 거리. 한 여인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좁은 골목길을 걸어간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허름한 여인숙 방안에 들어와 있다. 정면에 보이는 것은 벽지뿐, 그 여인은 온데간데없다.
그러다 살며시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이불 밖으로 흘러나온 흥건한 피와 그 옆에 놓여있는 콜라병 2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관객은 그제야 참혹한 범죄의 현장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김진아 감독의 VR(가상현실) 영화 '동두천'이다.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한국여성 성 노동자에 관한 12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로, 최근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VR 스토리 상을 받았다. 베니스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올해 처음으로 가상현실 경쟁부문을 신설했다.
13일 오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동두천' 상영 행사에서 김진아(44) 감독을 만났다.
'동두천'은 1992년 한국 사회를 큰 충격 속에 몰아넣은 미군 범죄인 '윤금이 살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는 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사건도 심각했지만, 당시 피해여성의 이미지가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보면서 너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죠."
김 감독은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비극적 이야기나 피해자가 고통받는 이야기를 다룰 때 이미지를 착취하거나 즐기는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슈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오랫동안 미군 범죄를 다룬 극영화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폭력을 재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번번이 막혀 포기했다가 VR을 알게 되면서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기어를 머리에 쓰고 감상하는 VR은 영화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 360도를 감상할 수 있어 고개를 위로 올리면 밤하늘이 보이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길바닥이 보인다. 그러다 보니 몰입감이 상당하다.
'동두천'은 특정 사건이 벌어지거나, 끔찍한 사체가 등장하지 않는 데도 그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김 감독은 "관객이 방관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느꼈을 고통을 체화하도록 하고 싶었다"면서 "이 영화는 특정한 사건을 넘어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힘이 있어 외국 관객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전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 칼 아츠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한 김 감독은 다큐멘터리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2)와 장편 영화 '그 집 앞'(2003)으로 주목을 받았다. 2004년에는 아시아 감독 최초로 하버드대의 초청을 받아 2007년까지 전임 교원을 지냈다. 2015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영화·방송·디지털미디어학과 종신 교수로 임용됐다.
국내 관객들에게는 하정우와 할리우드 여배우 베라 파미가가 주연한 영화 '두번째 사랑'으로 알려져 있다.
"제 작품에는 여성의 몸, 몸의 재현, 그리고 여성의 인권과 주체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또 2개 국가, 2개 이상의 언어가 나오죠. 영어로 표현하자면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한 작품이죠. 기지촌 여성의 경우 미국도, 한국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비참한 이방인으로 살아갔다는 점에서 같은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VR영화에 처음 도전한 김 감독은 앞으로 VR이 더욱 실용화되면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VR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합니다. 집을 사거나 가구를 살 때도 미리 체험해볼 수 있고 환경문제나 장애인 체험 등도 할 수 있죠. 휠체어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경험을 VR로 해본다면 장애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훨씬 넓어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죠. VR은 상업적인 면뿐만 아니라 인류 소통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약 중인 김 감독은 앞으로 VR영화 시리즈를 내놓을 계획이다. 또 한국영화를 미국에서 리메이크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