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디아스포라”. 2019년 뮌헨에서 열린 김진아 감독의 회고전의 타이틀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정확히 요약한다. 유학 생활 6년 간 거식증을 포함한 자신의 일상을 비디오 카메라로 기록한 후 157분의 비디오 에세이로 편집해 탄생한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 사랑하는 남편과 관계에서 임신이 잘 되지 않자 한국에서 온 불법체류자 지하(하정우)와 비밀리에 잠자리를 갖는 중년 여성 소피(베라 파미가)가 주인공인 <두번째 사랑> 등 김진아 감독의 영화는 늘 여성의 욕망과 이방인의 정서를 담고 있었다.
그가 만든 VR 영화 연작 역시 여성주의와 타자성과 관련이 깊다. 1992년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사건을 다룬 <동두천>, 1970년대 초 성병에 걸렸다고 의심받는 기지촌 여성들을 감금하고 치료했던 ‘몽키 하우스’가 배경인 <소요산>은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3부작’에 해당한다. UCLA 영화과 종신교수로 재직 중인 김진아 감독이 현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포함한 일로 한국에 체류 중이란 소식을 듣고 만남을 청했다. <동두천> <소요산>을 감상할 수 있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XR 섹션 ‘비욘드 리얼리티(Beyond Reality)’는 인천국제공항 제1교통센터에서 7월 18일까지 열린다.
-워낙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비디오 아트와 설치 미술, 독립영화와 대기업 스튜디오 영화를 자유롭게 오갔던 터라 VR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처음에 VR 작업을 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
=원래 미술을 전공했다 보니까 이 내용은 판으로 찍었으면 좋겠다, 설치 미술로 해야겠다, 퍼포먼스용이다 하면서 매체를 자유롭게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은 분명 있다. VR은 2016년 처음 붐이 일어났을 땐 다른 극영화를 준비하느라 바빠서 크게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VR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 모더레이터를 맡게 된 거다. 잘 모르면 민폐라는 생각이 들어서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 참석자들이 발제하는 글을 미리 읽고 준비하다 보니 VR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치 유레카처럼, 내가 그토록 영화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윤금이 이야기를 VR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파바박! 하고 들었다.
-감독님에게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사건이 큰 숙제였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내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던 1992년에 윤금이 사건으로 학교가 시끌시끌했다. 내겐 너무 큰 사건이었다.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 개인이 처절하게 살해된 사실 자체가 묻혀버릴 뻔했다는 것, 무엇보다 그 이미지를 직접 사용한다는 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한 여성이 죽은 모습을 세상에 보인다는 것 자체가 너무 큰 폭력이었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든 언론에 그 이미지가 나갔다. 폭력의 재현은 보는 사람에게도 그 피사체에게도 굉장한 폭력이라는 생각을 그때 직관적으로 했다. 왜 이 이미지가 포스터나 데모할 때 돌리는 전단지에 나와야 하는가에 대해 항의도 많이 했는데, 결국 학생회에서 돌아오는 답은 “위에서 그렇게 결정이 났다”, “이미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고 같은 여성으로서 너무 아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이 훼손된 사체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미지를 착취하며 그 반대가 됐으니까. 그 사진을 사용해야 한다고 끝까지 우겼던 사람들의 입장은, 이 정도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결국 한미관계 역사상 최초로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은 한국 법정에 섰고 실형을 받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승리라고 생각한다.
=전단지에 있는 말도 안 되는 영어 문구로 된 이상한 슬로건이 몸에 낙인을 찍는 것처럼 베였다. 이 사건이 창작을 하는 내게 어떤 정체성을 만들어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시아, 그것도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이구나. 언어의 제국주의를 당해내지 못해서 얼렁뚱땅 영어로 된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후기 식민주의 사회의 한 존재라는 게 너무 강렬하게 체화됐고 이후 내가 만든 모든 작품도 결국 그 얘기였던 거 같다. 윤금이 이야기를 극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매번 같은 딜레마에 봉착했다. 이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이미지를 착취하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는데 없었다. 기본적으로 2D 시네마 매체 자체에 우리가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심리학적 기제가 관음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결탁해서 영화로 장사를 하면 결국 폭력과 섹스를 벗어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영화 문법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VR을 체험하고 난 후 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고 불이 딱 켜지듯 생각이 든 거다. 그렇게 <동두천>을 만들었다. 내가 VR을 하게 된 건 1000%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소요산>은 1970년대 초 설립된 기지촌 여성들을 감금하고 치료했던 ‘몽키 하우스’를 담았다. 이 소재는 어떻게 발견했나.
=2015~16년 사이에 촬영 로케이션 스카우팅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다가 몽키 하우스에 가게 됐다. 아주 어렴풋이 정부가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를 하고 낙검자들을 관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 건물이 그렇게 멀쩡하게 남아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국사회가 잘 살게 되면서 한때 낙후됐던 동네를 완전히 싹 밀어내고 고층 빌딩을 올려서 다시 알아볼 수 없는 동네가 되기도 하는데, 그런 와중에 기지촌 여성들의 슬픔과 고통이 맺힌 장소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너무 희한했다. 이 건물을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너무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다음 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미군 위안부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VR 매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나.
=영화는 감독의 편집에 의한 거의 강압적인 주체성이 있다. 감독이 보여주는 것만 관객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다큐멘터리를 가르칠 때 중립적인 프레임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프레임을 잡는 순간 그 밖의 세상은 모두 버리는 거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독단적이고 남성적이고 반민주적인 매체다. 그에 반해 VR은 감독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관객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스토리텔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되게 난감해하는 감독들도 많은데 오히려 난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실험연극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궁극적으로 <동두천> <소요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게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떤 시공간에서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쓰러져서 없어진 분들이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귀신이라 불러도 좋고 유령이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있는, 어쨌든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 안에서 떠도는 존재들이다. 이 분들을 어떻게 표현하는 게 맞을까, 보여주지 않는 게 맞다.
-당신의 작품에는 늘 유목민으로서의 시선이 녹아있거나, 욕망하는 여성을 다뤘다. 이 테마가 <동두천> <소요산>에는 어떻게 연결이 되고 바뀌었나.
=어느 나라건 20대 여성이라면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자리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뿌리내릴 수 없는 여성의 정체성을 기록한 게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였다. 난 실제로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유목적인 삶을 살았다. 욕망과 디아스포라에 대한 이야기는 <그 집 앞>과 <두번째 사랑> 같은 극영화에서 더 강해졌다. 여성들에겐 주어진 한계가 분명하게 있는데, 그런 금기나 사회적인 제약을 깨게 하는 것은 결국 욕망이고 그게 멜로드라마의 본질이다. <두번째 사랑>에서 소피나 지하가 하는 행동은 결국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욕망 때문에 선을 넘고 나면 원래 갖고 있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향수가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디아스포라다. 그런데 여자는 나이가 들면 행복해지는 게 있다. (웃음) 개인의 분노가 사회로, 나보다 더 변방에서 타자로 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해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했다. 미국에서 종신교수가 되면서 이 생각이 더 강해졌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립대 교수로서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하면서 내가 누군지, 내가 가진 한계가 무엇인지도 봤다. 그리고 한미 관계에서 사라진 여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두 언어를 다 쓰는 사람들이 쿨하고 멋있다고들 하는데, 사실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쌍둥이 같은 존재가 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들이다. 한미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버려지고 소외당하고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진짜 유목민이다. 기지촌을 평생 떠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디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완벽한 유목민들. 어렸을 때는 내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면, 나이가 들고부터는 내가 아니면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작품 세계도 변한 것 같다. <동두천> <소요산>엔 전작과 다른 에너지가 있다.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는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찍었다면, <동두천> <소요산>은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기 위해 몸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는 시각 예술가로서 작업하던 때라 진짜 래디컬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실험하는 작품도 많이 기획했고, 그중 하나가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였다. 서사로 풀어가는 극영화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보여줘서는 안 됐다.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미학적 전략의 키워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몸의 부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여성의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제나 재현 윤리의 한계에 봉착한다. 몸을 보는 순간 생기는 많은 심리적 기제들은 이미 세상이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멈출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보여주지 않는데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주는 충격은 상당하다. 그리고 아주 불편하다.
-자신의 몸으로 다양한 실험을 했던 초기작의 경험이 있어서 몸의 부재로서 몸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작업도 가능하지 않을까.
=음, 맞는 것 같다. 워낙 내 몸을 재료로 너무 미친 짓을 많이 해봐서. (웃음) 보여준다고 해도 남성적 시선과는 다르게 보여주는 것 같고. <그 집 앞>에서 여성이 혼자 자위를 하다 오르가슴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6분짜리 롱테이크 신이 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충격을 많이 받았다. <두번째 사랑>에서 소피가 먼저 옷을 벗는 신도 남자들이 되게 불쾌해했다. 여성의 몸이 보여지는 관습과 전통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아서 불편한 거다.
-헨리와 양자경이 나온 한중 합작 영화 <파이널 레시피>는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요리 대회 이야기다. 김진아 감독의 작품 중 유일하게 여성의 신체에 관한 영화가 아니며 CJ E&M과 함께 작업했다.
=<두번째 사랑>을 만들고 나서 여러 투자사에서 연락이 왔다. 한미 합작 영화 제작에 대한 노하우가 있으니 제작자로 참여를 하거나 개발 단계만이라도 도와달라는 제안도 있었다. <파이널 레시피>는 처음에 크리에이티브 제작자로 시작했던 작품이다. 그러다 이 프로젝트의 끝을 보고 싶다는 오기도 생기고, 언어의 제국주의를 깨보고 싶다는 야심도 있었다. 미국에서 영어 제국주의는 정말 뼈에 와닿는 이야기다. <미나리>는 영어 대사가 거의 대부분인데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지 않았나. 아시안은 영어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미국은 전 세계 어딜 가서도 영어 영화를 찍는다. 중세시대 프랑스가 배경인데 영어를 쓴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데 할리우드니까 용인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영국 배우들을 데리고 와서 <오만과 편견>에 버금가는 중국의 고전을 중국어로 찍게 하는 건 가능할까? 백인들이 그렇게 하는 건 되고 아시안은 그렇게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걸까. 그래서 밀어붙인 게 <파이널 레시피>였다. 어쩌면 인종문제보다도 더 오래갈 영어 제국주의 문제를 상업영화에서 꼬아서 시도해보고 싶었다.
-평소 미국과 한국에 체류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되나.
=작년엔 정확히 반반 있었다. UCLA 종신교수가 된 후에는 한국에 오래 있지는 못했는데, 작년엔 <소요산>의 후반 작업과 집안일 때문에 한국에 있어야 했다. 어차피 팬데믹 상황이라 줌으로 수업을 한다면 한국에 있어도 괜찮지 않냐고 학교에서 이해해줬다. 그런데 말이 쉽지 진짜 죽을 맛이더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강의를 한다는 게…. (웃음)
-하버드대학교에서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연출, 한국영화 이론을 강의한 걸로 아는데, 지금 UCLA에서 어떤 걸 가르치나.
=UCLA의 영화, 텔레비전,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 학과에서 영화를 담당한다. 연출 수업도 하고 내가 좀더 특화되는 영역은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다.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는 트랜스내셔널한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그 사람들의 정체성은 20세기의 모순과 연관되어 있다. 경제적 이유로 했던 이민,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신매매, 입양, 난민, 전쟁…. 영화적인 매체를 통해 사회 변혁을 이루어내는 방법을 연구하고 학생에게 가르치는 일도 한다.
-해외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은 한국영화나 트랜스내셔널 시네마에 대해 어떤 시선을 갖고 있나.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는 공감하는 학생이 굉장히 많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니까. 하버드에서 한국영화를 가르치던 2005~2006년에는 좀 배운 게 많고 가방끈이 긴 학생들이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웃음) 유럽에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나 이창동 감독의 예술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2013년에 다시 하버드로 갔을 때는 평범한 미국·영국 백인 학생들이 그냥 제작 수업인데도 한국영화 얘기를 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 예술영화까지 찾아보더라. <기생충> 이후에는 한국이 문화 선진국, 영화의 제1세계라는 인식은 너무나 만연해 있다. 외국어 영화라는 단서를 달지 않아도 좋은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여러 자리를 통해 김진아 감독의 작품을 돌아보고 특히 젊은 여성들이 영향을 받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도 한국의 재능 있는 2~30대 여성들을 발굴하고 교육하고 멘토링 하는 것을 좋아한다. UCLA에서 익명의 기부자가 기금을 만들어 매년 아랍계 여성 5명을 뽑아 장학금과 생활비를 대겠다고 했다.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랍 여성들이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찡했다. 지금 한국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2~30대 여성들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정당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이 건강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그들의 영화도 계속 나와야 한다. 최근 한국 여성 감독들이 많이 등장한 것은 너무 반가운 일이지만 왜 상업영화는 여전히 남성 위주인지,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하고 바꾸어나갈지 신랄하고 솔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악순환 구조가 선순환 구조로 바뀔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