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blished December 22, 2022 - Full Article
에디터: 김나랑 | 포토: 싸이언 필름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VR 3부작 <동두천>에 이어 두 번째 작품 <소요산>이 공개됐다. 소외된 여성의 아픔에 강력한 체험을 전하는 이들 작품은 유수의 영화제 수상을 제하고도, VR이 필히 나가야 할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지난해 11월 김진아 감독의 VR 작품 <소요산(Tearless)>이 제27회 제네바국제영화제 가상현실 경쟁 부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VR 3부작 <동두천(Bloodless)>에 이은 두 번째 작품이다. <동두천>은 1992년 미군이 기지촌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해 한국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사건을 주목하며, 2017년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VR 스토리상’을 수상했다. 김진아 감독은 2009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여성 감독 최초로 장편 경쟁 부문 심사위원을 맡았다.
<소요산>은 ‘몽키하우스’가 배경이다. 몽키하우스는 1970년대 초, 성병에 감염됐다고 추정되는 기지촌 여성을 고립시키고 치료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설립하고 미군이 운용한 낙검자 수용소의 별칭이다. VR 장치를 통해 <소요산>을 관람했다. 360도로 구현된 몽키하우스에 들어가는 것 자체부터 식은땀이 나고, 한 여성(배우 김보령)의 공허한 눈빛을 마주하자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 강력한 체험은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할 수 있다.
김진아 감독에게는 ‘아시아 여성 최초’란 수식이 늘 따라다닌다. 1996년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99년 캘리포니아예술대학교 대학원 영화 전공 석사를 취득했다. 하버드대 시각예술환경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친 최초의 아시아 여성이고, 현재 아시아 여성 최초로 UCLA 영화과 종신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감독으로선 장르 불문 다양한 작품을 해왔다. 1999년 단편영화 <빈집>으로 데뷔했고, 2002년 다큐멘터리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1995년부터 2000년까지 낯선 이국 생활을 기록한 비디오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실험 다큐멘터리), 2003년 극영화 <그 집 앞>(섭식 장애를 가진 여성과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 2007년 극영화 <두번째 사랑>(베라 파미가, 하정우 주연의 영화로 다른 인종·국적·계급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멜로드라마. 최초의 한미 합작 영화로 이창동 감독 제작, 마이클 니만 음악으로 화제를 모았다), 2009년 다큐멘터리 <서울의 얼굴>(삼풍백화점이 무너진 1995년부터 2009년까지 급변하는 서울을 기록한 비디오 에세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프랑스에서 서적으로 출판됐다), 2014년 극영화 <파이널 레시피>(양자경, 헨리 주연의 한중 합작 영화. 베를린국제영화제 컬리너리 시네마 부문 개막작으로 중국에서만 3,000여 곳의 개봉관에서 상영했다)를 만들었다.
김진아 감독의 다음 도전이 VR이었다. 여성을 고통으로 질주하게 만든 역사와 사건에 대해 감독은 부채 의식을 느껴왔다. 25년간 극영화로 만들어보려 했으나 문제(재현 윤리)에 부딪혔고, 그렇기에 VR을 선택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한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체험이 될 수 있어서다. 김진아 감독의 <동두천>과 <소요산> 제작기는 잊지 말아야 할 여성의 이야기기도 하다.
<동두천>과 <소요산>은 미군 위안부 VR 3부작 중 일부죠. 당신은 대학교 1학년이던 1992년, 주한 미군의 기지촌 여성 살인 사건을 접합니다. 당시 사건의 공론화를 위해 살해된 여성의 사체 사진을 공개했는데, 여성의 몸이 그런 식으로 사용되는 것에 부채를 느꼈다고 들었습니다. 25년간 계속된 죄책감이 3부작의 출발점인가요?
부채감이 출발점이 된 것은 맞습니다. 당시 다니던 대학 캠퍼스 곳곳에 관련 대자보가 붙었고, 그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와 제 동성의 동기들은 참혹하게 살해된 여성의 이미지가 공개된 대자보를 마주할 때마다 할 말을 잃고 망연히 서 있곤 했죠. 사건 자체에 대한 분노도 컸지만, 피해자 여성의 이미지가 무한 복제되어 여성 자신이 아닌 다른 ‘대의’를 위해 사용되는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컸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만, 당시로서는 그 분노를 설명할 수 있는 논리와 언어를 찾지 못했고, 언어를 찾지 못해 분출되지 못한 분노가 제 무력함에 대한 죄책감, 피해자에 대한 부채감으로 내면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필모그래피가 다양합니다. 한중 합작 상업 영화인 <파이널 레시피>, 개인적인 에세이 다큐멘터리 <서울의 얼굴>, 또 VR 영화도 작업했죠. 이에 대해 “미술을 전공했기에 보통의 영화감독과 태도가 조금 다르다. 대부분의 감독이 장편 상업 영화를 목표로 삼는데, 나는 크레용으로 그리든, 유화를 그리든, 설치 작품을 만들든, 그때 맞는 미디어 매체를 찾아서 표현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동두천> <소요산>은 VR 매체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VR 매체를 2016년 가을 처음 접하며 바로 깨달은 것은 이 매체의 미학적 기조가 일반 2D 영화와 같은 ‘관음’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점입니다. 장편 극영화를 오락으로 즐길 수 있는 이유는 그 심리적 기제가 관음이기 때문이죠. 눈앞에서 폭탄이 떨어져도, 사람들이 좀비에게 물려 죽어가도 팝콘을 먹을 수 있는 건, 스크린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심리적 거리 때문이에요. VR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비록 ‘가상’일망정 관객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공간에 정말로 있는 것처럼 느끼거든요. 이런 2D 영화와 VR의 본질적 차이를 깨닫는 순간, 25년간 극영화로 만들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매번 같은 문제(재현 윤리)에 부딪혀 포기했던 그 살해 사건 이야기를 드디어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VR 매체라면 관객에게 사건과 여성의 몸을 볼거리로 제공하지 않고, 그 사건의 공간과 시적으로 재건한 내러티브를 ‘경험’ 혹은 ‘체험’하게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긴 거지요.
<소요산>에는 몽키하우스가 등장합니다. VR 헤드셋을 착용한 관객은 몽키하우스 건물로 들어가 공동 침실, 화장실, 식당, 치료실 등을 체험합니다. <동두천>을 위해 자료 조사를 하던 중 몽키하우스를 발견했다고 들었어요. 당시 어떤 느낌이었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나요?
몽키하우스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소요산 낙검자 수용소는 미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이야기하는 중요한 곳이라 <동두천> 사전 조사 때 가장 먼저 방문했어요. 처음 건물 앞에 섰을 때 느낌은 ‘어떻게 이게 아직까지…’였습니다. 단순히 건물이 오래되고 낡아서가 아니라, 건물에서 무언가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졌다는 기운이 마당부터 서려 있어요. 몇몇 스태프는 들어가기를 꺼릴 정도로 내부 역시 음산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럽게 훼손되고 자동차 보닛부터 찢어진 이불, 테이크아웃 커피 종이컵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어요. 처음 방문한 2016년만 해도 나무 문짝 등이 성하게 달려 있었는데, 그 후 다시 방문할 때마다 하나둘 사라졌고 훼손과 낙서의 정도도 더 심해졌고요. 2020년 여름의 역대급 장마 이후로는 과연 이 건물이 얼마나 오래 버틸까 염려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제작자 조수아 피디도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경악할 일이지만, 아직까지 이렇게 남아 있다는 사실 역시 참혹하고 끔찍했습니다. 사용이 중단된 후로는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아 기약 없이 방치된,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림자 같은 장소니까요.
<동두천>은 “방에서 피 흘리며 혼자 죽어가는 여성과 함께하고 싶어서 그 방을 모티브로 작품을 구상했다”고 했죠. 그래서 피해자의 방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아 그 동네의 다른 여인숙에서 촬영했어요. <소요산>을 촬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과 준비 과정이 궁금해요.
2년 정도의 사전 조사가 끝나고 가장 공들여 고민한 부분은 이 건물에 어떻게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접근해야 옳은지였습니다. 영화의 시각적 주인공이 수용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으니 건물을 대하는 태도가 전기 영화나 다큐멘터리의 대상 인물을 접근하듯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어요. 말했듯이 훼손이 너무 심각했는데, 2020년에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담아야 옳을지, 조금이라도 이전의 모습을 찾도록 쓰레기 정도는 치워야 옳은지 등 여러 고민이 있었습니다. 오랜 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원래부터 이 건물에 속한 것이면 어떤 쓰레기나 잔해도 건드리지 않는 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건물에 원래 속하지 않고 후대 사람들이 밖에서 갖고 들어온 쓰레기는 치우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사실 말처럼 쉽지 않았어요. 부패되어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함께 치우는 동시에 건물의 창이나 벽에서 떨어진 것이면 유리 조각 하나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했거든요. 미술팀과 촬영팀, 제작팀, 연출팀까지 모두 저와 뜻을 같이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소요산>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 빗소리 등이 인상적이었어요. <소요산>의 영문 제목 ‘Tearless’와 관계가 있나요?
아이러니를 제목에 집어넣기를 좋아합니다. 한글 제목보다 먼저 만든 <그 집 앞>의 영문 제목은 ‘Invisible Light’이고, <두번째 사랑>의 영문 제목은 ‘Never Forever’예요. 미군 위안부 3부작 역시 한글 제목보다 영문 제목을 먼저 만들었어요. <동두천>의 영문 제목은 ‘Bloodless’이고, <소요산>의 영문 제목은 ‘Tearless’예요. 저는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액체, 특히 고통받을 때 흘러나오는 액체가 피와 눈물이라는 사실에 집착합니다. <동두천>에서는 직접적 사인이 출혈 과다였던 윤금이 씨가 죽어가면서 흘린 피, <소요산>에서는 몽키하우스에서 수많은 여성이 흘렸을 눈물을 역설적으로(…less …없는)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소요산>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관객에게 시간 여행을 하게 해 낙검자 수용소로 쓰이던 과거를 보게 하고, 갇혀 있던 여자의 현존을 알립니다. 그 물소리는 마지막 신에서 끝내 비(눈물)로 쏟아져 관객을 압도합니다.
<소요산>에서 360도로 비 내리는 장면은 구현하기 힘들었을 텐데요. 2017년 <동두천>을 작업할 때에 비해 VR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소요산>에서 기술적으로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기술이 발전했지만 예산과 시공간의 한계를 느끼면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실사(Live Action)로 촬영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거니와 실사의 질감을 유지하면서 3D로 하는 CG 작업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비 작업은 촬영 후 바로 영국의 ‘The Mill’, 미국의 ‘NightLight Labs’ 등 쟁쟁한 후반 작업 업체에 맡겨 테스트를 진행했어요. 그런데 결과물에 흡족할 수 없었습니다. 기능적으로 ‘비가 온다’는 것을 알게 하기에는 충분한 영상이었지만 감성이 붙지 않았거든요.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결국 포기하고 마무리 색 보정 작업을 하러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마무리 작업을 도와주던 ‘벤타VR’의 김기현 팀장이 기술적 한계로 시나리오가 바뀐 사실을 너무 안타까워했어요. 결국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을 시도했고, 성공했습니다. 영국, 미국, 호주의 큰 업체가 포기한 작업을, 한국의 상대적으로 작은 업체인 벤타VR이 고농도의 기술력과 수작업으로 만들어낸 거죠!
일반 극영화와 VR 영화를 비교하면 감독으로서 필요한 역량이 달라지나요?
달라지죠.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역량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창작물과 관객의 관계에 대한 철학이 달라지는 것일 수도 있겠어요. 극영화를 공부하고, 만들고, 가르치면서 늘 생각하는 점은 2D 극영화만큼 창작자의 독단이 작품의 미학적 근간이 되는 매체는 없다는 겁니다. 일단 카메라로 프레임을 잡는 순간 그 직사각형 (프레임) 바깥의 세상은 다 버려집니다. 관객은 감독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인물과 풍광과 사물만 수동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편집을 통해 이야기를 구축하는 방식이 주류가 되면서, 관객이 순차적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할지 감독은 미리 다 정해놓을 수 있게 되었죠. 360도 VR은 다릅니다. 관객이 어디를 볼지, 또 무엇을 먼저 볼지 감독이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VR 매체는 2D 영화보다는 오히려 관객이 가운데에 모여 있고 배우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극장 전체를 마구 휘젓고 다니는 실험 연극에 가까워요.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영화감독이 VR을 시도해보고 도망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동두천>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VR 스토리상’을, <소요산>으로 제네바국제영화제의 ‘가상현실 경쟁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2017은 VR 원년이라고 불리던 때였어요. VR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지금의 메타버스 붐에 비견할 정도로 전 세계를 흥분시켰죠. VR은 비디오게임에 가깝지 영화적인 매체는 아니라는 보수적인 의견을 베니스국제영화제가 VR 공식 경쟁 부문을 신설하면서 화끈하게 묵살하기도 했고요. <뉴욕 타임스>를 위시한 언론 매체는 VR이 저널리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사회변혁을 위한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환호했습니다. 그해에 3대 영화제 중 최초로 만들어진 베니스의 VR 경쟁 부문에서 <동두천>이 수상하고, 이어 <필름메이커> 매거진에 의해 ‘2017년 VR 영화’로 선정되자, 저 역시 늘 꿈꾸던 민주적인 미디어, 새로운 형태의 공감-기계라는 것이 VR로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희망도 가졌고요. 그런데 몇 해 지난 지금, 예상과 조금 다른 방향으로 VR 기술이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공감-기계(Empathy Machine)’ ‘사회변혁을 위한 매체(Media for Social Change)’ 등 기존에 VR을 묘사하던 키워드가 많이 퇴색한 것 같아요. 더구나 팬데믹 상황과 맞물려 최근 몇 년간의 VR은 애니메이션이 대세였고, 실사 VR이나 VR 다큐멘터리는 많이 만들어지지 않아요. 이런 상황이라 <소요산>이 제네바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이 개인적으로는 베니스에서 거둔 수상보다 더 기뻤어요. 물론 2009년 장편 경쟁 부문 심사위원을 맡았고, <서울의 얼굴>이 좋아하는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away) 감독의 작품과 나란히 상영돼, 개인적으로 각별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영광스럽죠. 하지만 제네바에서의 수상은 거대 자본이 들어간 비디오게임과 현란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주류인 상황에서 시류를 거슬러 고집스럽게 만든 작품이 끌어낸 성과라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동두천>의 베니스국제영화제 ‘베스트 VR 스토리상’ 수상 당시, 한국과 외국 관객이 느끼는 점이 달랐다고 말했죠. “한국 관객은 동두천이란 장소에 들어간다는 공포가 강한 반면, 외국 관객은 지적인 관점에서 보았다.” <동두천> <소요산>은 한국인이 직접적으로 마주한 역사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기지촌 여성을 올바르게 다룬 작품은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들의 삶을 더 공론화해야 할까요?
사실 기지촌 여성이라고 불리는 미군 위안부에 관해 이야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에요. 축소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미군 기지가 있고, 그 주변에 미군의 편의를 위해 세워진 기지촌이 있어요. 주한 미군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이슈는 너무나 복잡하고 어쩌면 그래서 더 많은 영화가 못 나오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치, 역사 같은 거대 담론을 떠나서 이 여성들의 인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공론화해야 한다는 것엔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봐요. 21세기 들어 트랜스내셔널한 (초국가적인) 한국인이 점점 늘고 있어요. 조기 유학을 떠나 이중 언어를 완벽히 구사하며, 자의에 의해 노마드로 살아가는 신인류가 대한민국에 만들어진 것이죠. 이들은 국제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한국과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환영받는 인재예요.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한국 사회가 이렇게 잘살기 전, 한국과 미국, 양국에 이용당하고 버려져 자의가 아닌 타의로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버린 기지촌 여성들, 그분들의 혼혈 자녀가 있어요. 한때 대한민국 GDP의 25%를 외화로 벌어들였다는 이 여성들의 삶을 공론화하지 않고서 한국의 과거와 미래를 어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이분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데 말이죠.
2009년 <피플 인사이드>에서 “아시아인, 한국인, 여성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그것을 잔인할 만큼 정직하게 그려내려고 노력한다”고 인터뷰했죠. 여전히 유효한가요?
미국과 한국에서 교육자와 영화감독으로 살아온 25년 동안 많은 긍정적 변화가 있었지만 21세기가 5분의 1이나 지나간 지금도(!) 백인 남성 중심인 세계에서 아시아인 여성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아요. 하버드대학에서는 시각예술환경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친 최초이자 유일한 아시아 여성이었고, 지금 일하는 UCLA 영화과에서도 종신 교수가 된 첫 아시아 여성이에요. 영화 산업 속에서도 제 일터의 대부분은 백인 남성으로 가득해요. 고리타분한 논의 같지만 조금만 한국을 벗어나면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여성이라는 사실, 피부색으로 정체성이 정의되는 세계에서 아시아인이라는 사실은 너무나 중요함을 절감해요. 단순히 유리 천장을 깨겠다는 외연적인 확장의 시도나, 피해자 서사를 반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을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일이라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잔인할’ 만큼 ‘정직한’ 자화상을 그려내고 싶어요.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소요산>을 상영합니다. 모바일 증강 현실로 구현되고, 메타버스 가상 공간에서도 선보이죠. 더 많은 관객이 <소요산>을 접할 기회인데, 이 작품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나요? 관람 시 주의할 점이 있나요?
어쩌다 보니 상업 극영화부터 비디오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르의 작품을 했고 가상현실, 메타버스라는 최첨단 기술까지 실험했지만 사실 저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영화의 힘을 믿는 사람이에요. 강력한 서사를 가진 논픽션 영화가 주는 명징함에 엄청난 존경심을 갖고 있어요. 다만 이 미군 위안부 문제만큼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떠나 이분들의 고통에 공감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지적으로 이해하거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기보다는 그냥 피부로, 귀로, 가슴으로, 그렇게 감각으로 먼저 가닿았으면 좋겠어요. 무언가를 진정으로 느낀다면 의식의 변화는 자연히 찾아오니까요. 그리고 개개인의 의식 변화는 기필코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냅니다. 그래서 아무 기대 없이, 사전 지식 없이 와도 좋습니다. 다만, VR 관람은 360도를 다 보셔야 하는 것이니, 회전의자에 앉아 몸을 적극적으로 돌리길 당부드려요(웃음).
<소요산>에 이은 세 번째 작품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은 아마도 3부작 중 제일 시각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한때 남한에는 96개의 기지촌이 있었고 그 기지촌과 미군 기지를 합친 면적은 남한 가용 면적의 17%에 육박했어요. 그 모든 기지촌을 방문해 가상현실로 담기란 현실적으로 어렵기에 3부는 <동두천>이나 <소요산>처럼 한 지역에 집중된 이야기라기보다 좀 더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작품이 될 것 같아요. 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일반 영화 작업도 추진 중이에요. <소요산>을 만들고 나자 이 주제를 일반 극영화 매체로 어떻게 풀어낼지 어렴풋한 감각과 용기가 생겼습니다. 영화는 1970년대 초부터 2017년까지, 기지촌 안팎을 둘러싼 여성들의 삶을 따라가는 내용인데, 시대를 관통하며 우리 모두의 삶이 어떻게 미군 위안부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제까지 저의 모든 작품이 그랬듯, 또다시 한미 양국을 오가며 만드는 국제 합작 영화가 나올 것 같아요.
10년 전, 감독으로서 꿈을 묻자 “가장 개인적인 얘기가 가장 정치적이고, 가장 특수한 얘기가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다.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답했어요. 그 바람은 여전히 유효한가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은 1960~1970년대 여성주의자들의 모토인데 10년 전에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냥 정직하고 성실한 작품, 자화상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제가 만든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나 자신이라고 느껴져요. 그만큼 창작이란 작업은 껴안는 사람만이 생산하는 거죠. 학생들을 가르칠 때 “Why me?” “Why now?” 라는 두 질문에 대한 절박한 답이 나오지 않으면 진정성을 의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내게도 똑같이 요구해요.
2014년 하버드대학교 최고 교육자상 수상, 2018년 <버라이어티>의 세계 최고 영화 교육자 10인에 선정됐죠. 현재 UCLA 영화과 종신 교수인데, 창작 활동과 별개로 영화 학도를 교육하는 일은 어떤 매력이 있나요? 교육 철학도 궁금합니다.
사실 예술교육이란 것은 단순해요. 그저 각자의 고유성을 꽃피우도록 도움을 주는 일에 불과해요. 영혼의 고유성이야 이미 갖고 있고, 그것이 적절한 형식을 찾을 수 있게, 더 나아가 그의 목소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선생의 일이겠죠. 물론, 그 ‘적절한 형식을 찾게’ 돕는 일에는 급변하는 현대 기술 문명과 가치를 준비시키는 일도 있어요. 제가 2022년 하는 강의는 팬데믹 기간 미국 내에서 일어난 동양인 혐오 범죄 관련 데이터와 통계를 시각화·예술화하는 AR 수업이에요. 2017년 미투 운동으로 움트고 2020년 ‘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부터 퍼져 나간 미국 사회의 의식화는 젊은 세대를 영원히 변화시켰어요. 이에 새롭게 눈뜬 학생들이 영상 매체를 사회변혁을 위해 활용하고 싶다는 의지를 강렬하게 표명해요. ‘Visualizing Anti-Asian Violence’ 라는 제 AR 수업은 그런 학생들의 열망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자연과학 분야에서 활용되는 연구소(Lab) 형식으로 자율적인 교육 방법을 구축하고 싶은 저의 시도이기도 해요. 사실 요즘 학생들은 너무 영민한 데다가 인터넷으로 거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시대라 지식적인 면, 기술적인 면은 가르칠 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늘 그들의 유능함에 감탄하며 배웁니다. 하지만 젊고 미숙한 예술가를 잠재적 거장으로 바라보고,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일은 선생님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영화 만드는 일만큼이나 정원 가꾸기가 제 일상을 많이 차지하는데, 교육은 깨알같이 작은 꽃씨를 심고, 물을 주고, 해를 비춰주고, 기다려주는 일과 비슷해요. 꽃이 피는 것을 볼 때의 경이로움은 모든 고생을 잊게 하죠. 꽃처럼 사람이 피어나는 것도 볼 수 있는 저는 정말 행운아예요.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