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남자 미국여자 격정 연애담

<네버 포에버> 뉴욕 제작기 

실질적인 한미 합작 1호 프로젝트인 김진아 감독의 <네버 포에버>가 최근 크랭크업했다. 베라 파미가를 캐스팅, 뉴욕에서 로케이션을 끝내기까지 <네버 포에버> 프로덕션의 전모를 들여다본다.

한국영화가 거대한 미국시장의 벽을 두드리고 있다. 아시아권에서는 한국영화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지만 여전히 북미시장에서는 그 인지도가 미미하다. 장이모우 감독의 <영웅>이 미국에서는 3,000개나 넘는 스크린을 확보,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미국개봉 당시 29개의 스크린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 혹은 스크린당 좌석점유율을 떠나 북미시장에서 한국영화는 영원한 마이너리티다. 

최근 이처럼 견고한 미국시장을 겨냥한 한미 합작영화 제작이 잇따르고 있다. 엘제이필름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제작한 미국의 포커스필름과 합작계약을 맺고 <프린세스 줄리아>를 제작 중이며, 아이에치큐는 LA에 지사까지 세웠다. 한편, CJ엔터테인먼트는 한국계 마이클 강 감독이 연출하는 <웨스트 32번가>를 통해 미국 내 직접 배급에 나설 예정이다. 

이 같은 사례들은 과거처럼 단순히 미국 현지 인력들을 고용하는 로케이션 수준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에 앞서 가장 먼저 한미 합작 테이프를 끊은 것은 지난 9월 초 크랭크업한 하정우, 데이비드 맥기니스, 베라 파미가 주연, 김진아 감독의 <네버 포에버>다. <김진아의 비디오 다이어리>(2001)와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초청작 <그 집 앞>(2003)을 만든 김진아 감독은 현재 하버드대에서 영화제작전공 교수로 강의를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창립작으로 박흥식 감독의 <인어공주>(2004)를 제작했던 나우필름은 이렇게 박스3(VOX3)와 합작계약을 맺고 두 번째 영화로 제법 만만찮은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박스3는 2002년 선댄스영화제에서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세크리터리>를 제작한 회사로 올해 1회가 열리는 로마영화제의 개막작인 니콜 키드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연의 <퍼>를 제작하며 한창 주목받고 있는 중급 규모의 영화사다. 물론 <네버 포에버>가 <영웅>이나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대작은 아니며 김진아 감독 역시 국내에 특별한 대중적 인지도를 얻고 있는 감독은 아니다. 하지만 <네버 포에버>는 중급 장르 영화의 북미시장 공략과 효율적인 배급, 미국 제작 시스템 내에서의 본격적인 프로덕션 가동이라는 점에서 단연 눈여겨 볼 만한 사례다. 

<네버 포에버>는 강렬한 러브스토리 

김진아 감독은 이전부터 나우필름과 차기작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그를 주목하고 있던 나우필름의 이준동 대표는 기존 충무로 영화와는 색다른 감성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그렇게 작년에 <네버 포에버>와는 다른 아이템을 개발하고 있던 중 이야기는 완전히 마무리되지 못 했고 김진아 감독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가서 좀 더 고민하겠다고 말한 김진아 감독이 얼마 뒤 <네버 포에버>의 첫 번째 트리트먼트를 보내왔다. 본인 스스로가 오랜 미국생활을 해왔던 터, 그가 느껴왔던 미국생활의 디테일한 정서들이 한국적 맥락과도 깊게 맞닿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 작들과는 사뭇 다른 전형적이고도 격정적인 멜로영화였다. 첫 번째 트리트먼트에 이준동 대표는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김진아 감독 역시 ‘100% 멜로드라마’라고 얘기하고 이준동 대표 역시 ‘멜로영화의 드라마투르기에 충실한 섬세하면서도 통속적인 연애담’이라고 말한다. 김진아 감독의 이전 작들인 <김진아의 비디오 다이어리>나 <그 집 앞>과 비교하자면 좀 더 장르성에 충실한 정통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성공한 한국계 미국인 변호사 앤드류(데이비드 맥기니스)가 백인 아내 소피(베라 파미가)와 결혼한다. 뉴욕에 살지만 아들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한국인 커뮤니티를 고수하고 있는 그 가족 안에서 소피는 불편함을 느낀다. 가족의 바람대로 아들을 낳고 싶지만 잘 되지 않는다. 여기에 남편의 폭력까지 더해진다. 급기야 소피는 아들을 낳기 위해 우연히 알게 된 한국남자 지하(하정우)와 정자 제공을 조건으로 섹스 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계약으로 시작된 둘의 관계가 격정적인 연애의 감정으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네버 포에버>는 지극히 통속적인 감정들의 연속으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가장 강렬한 정서를 전달한다. 김진아 감독이 전작들에서 보여준 실험적인 스타일과 작가적 면모가 <네버 포에버>를 향한 어떤 선입견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준동 대표는 “<네버 포에버>가 너무나 흡입력 있고, 보편적인 멜로드라마라는 것에 끌렸다. 지극히 통속적인 것이 얼마나 강렬한 감정을 전달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김진아 감독도 <네버 포에버>가 자신의 첫 번째 본격적인 상업 영화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나의 첫 상업 영화’라는 것 외에는 이번 작업에 대해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소위 말하는 상업 영화의 본분에 충실한, 보다 대중적인 호흡으로 폭넓은 만남의 장에 서고 싶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것은 “진심으로 애정이 가지 않는 대상이나 이야기가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원칙만큼은 명쾌하다고 말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관음을 본질적 미학으로 하는 것이다보니 그 관음을 정당화할 변명거리가 필요하다. 내게 있어서 그 변명은 대상에 대한 '격렬한 애정'이다. 여기서 나만의 테마라면 ‘원하면 안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을 찾게 되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내 영화의 변하지 않는 테마”라는 게 그의 얘기다. 

VOX3와의 합작, 그리고 베라 파미가 

<네버 포에버>의 무대는 뉴욕, 이전 한국영화들처럼 현지 배우를 섭외해 로케이션만 미국에서 하고 한국인 스탭들로만 꾸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제작자로서는 편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준동 대표는 좀 더 생각을 확장시켜 한미 합작을 구상했다. 발상을 전환하고 보니 오히려 그것이 장기적으로 더 쉽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이준동 대표는 “부담은 줄이고 기회는 높이고, 제작자 입장에서는 기존 방식으로 가면 편한데, 내부적으로 고민해보니 오히려 합작 형식이 더 낫겠다는 결론이 났다. 먼저 우리가 직접 현지 진행을 하게 되면 크리에이티브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다른 데 신경 쓰느라 낭비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직접 하면 베라 파미가 같은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기도 힘들다”며 “박스3와 접촉하면서 우리가 시나리오 등 크리에이티브를 책임지면, 그쪽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덕션상의 인력 고용이나 현지 로케이션 진행을 맡기로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의 시나리오였다. “박스3에서 시나리오에 대한 반응이 너무 좋았다. 아마도 그쪽에서 작품 자체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면 합작은 힘들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제작자 앤드류 피어버그가 이끌고 있는 박스3는 국내에서도 개봉했던 <세크리터리> 이후 한창 주목받고 있는 제작사다. 박스3에서 제작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는 <세크리터리>의 스티븐 샤인버그 감독은 이후 니콜 키드먼을 캐스팅하고, <매트릭스> 시리즈의 빌 포프 촬영감독까지 끌어들여 <퍼>를 완성하며 단숨에 주목받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세크리터리>의 스티븐 피어버그 촬영감독이 앤드류 피어버그의 동생으로, 동생이 먼저 영화계에 투신한 이후 영화계로 건너온 앤드류는 박스3 이전 활동까지 포함 20편 이상을 제작한 베테랑 제작자다. 합작계획이 무르익어가던 중 이준동 대표는 앤드류를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했고 두 사람이 막역한 ‘소주’ 친구가 되면서 프로젝트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앤드류는 <네버 포에버> 촬영차 뉴욕을 찾은 이준동 대표를 ‘괜찮은 한국식당 발견했다’며 안내, 자신이 먼저 소주를 권할 정도로 지한파가 됐다. 베라 파미가를 캐스팅하고, 실력 좋은 인력들이 <네버 포에버>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박스3와의 합작 덕분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캐스팅 작업이 시작되면서 나우필름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3명 정도의 배우를 추천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밀려 있는 작품들이 있어 수월하게 캐스팅할 수 있는 배우들이 아니었다. 그즈음 현지 캐스팅 디렉터가 추천한 배우가 바로 베라 파미가였다. 하지만 그 역시 2006년 개봉 영화가 5편이나 되는 소위 막 뜨기 시작한 배우라 그마저도 확정적인 건 아니었다. 국내 미개봉작인 <다운 투 더 본>으로 선댄스영화제 특별 심사위원상을 받은 그는 <무간도>의 리메이크작인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에 주연(원작의 진혜림 역할)으로 캐스팅되면서 주가가 급상승 중이며, 국내에는 <러닝 스케어드>를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최근 9월 3일자 ‘뉴욕타임스’ 지는 그에 대한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에 대한 김진아 감독의 만족도는 더할 나위 없다. “베라는 처음 <다운 투 더 본>을 보고 알게 됐다. 이외에도 애드리언 브로디와 주연한 <더미> 등 한국에서 개봉되지 않은 몇 개의 영화가 더 있는데 정말 무서운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고 나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그녀에게 반해 <디파티드>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맷 데이먼의 상대역인 여자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는데 너무 만족한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신작 <브레이킹 앤 엔터링>에 베라를 캐스팅한 안소니 밍겔라 감독도 좋은 배우라고 여기저기 공식적으로 소문을 내고 다니고, 하여간 캐스팅 디렉터는 현재 너무 주목받고 있어 캐스팅하기 힘들 거라고 했다. 반신반의하며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며칠 후 시나리오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며 40도가 넘는 고열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러 나와 줬다. 정말 고마웠고, 첫 인상에서 완벽한 소피라는 느낌이 왔다.” 
더욱이 쫑파티 날, 한국 스탭들의 손에 이끌려 난생 처음 노래방에 가게 된 베라 파미가는 최후의 네 사람이 남을 때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았을 정도로 제작자 앤드류 피어버그만큼이나 지한파가 됐다. 촬영 내내 모든 대사를 영어로 소화한 하정우의 적극성도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미 합작, 모범사례 써나간다

이준동 대표는 <네버 포에버>가 한미 합작의 실질적인 첫 번째이자, 그 시스템에 가장 충실한 영화 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한국영화가 미국에 진입하는 방식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국내 시장을 벗어나 미국시장의 문을 두드려볼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대작 영화가 아니면서 적정한 예산의 영화로 미국의 영화산업과 제작 시스템을 제대로 체험하고, 이후 노하우까지전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만큼 <네버 포에버>는 단순한 현지 인력 고용 차원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제작 전반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익혔다. 그 시작에는 다소 두려움이 앞섰지만 이제는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제작 초기 배우노조, 운송노조 등으로부터 영화제작 허가서를 받아야 워킹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일을 추진하다 뒤늦게 알고 홍역을 치렀던 걸 제외하고는 이후 작업은 순조로웠다. “촬영하면서 힘든 점은 없었다. 계획대로 진행이 됐고 다만 언어 문제도 있고 스탭 성향에 대해 처음에는 걱정이 많았지만 한국 쪽 촬영, 조명팀의 성향이 다소 다르듯 여기서도 그런 미세한 공통점들을 발견하고 보니 ‘영화하는 사람들 어디나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흥미로웠다”고 말한다. 가령 아시아 사람들과 달리 현지 미국인 캐스팅 디렉터가 아시아인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해서 한국인 가족 엑스트라들을 구성해야 하는데 각기 다른 중국, 일본, 필리핀 사람들을 구해와서 난감한 경우 정도는 귀여운 에피소드에 속한다. 
 
워낙 계약이 철저하기 때문에 미국의 영화제작 시스템이 한국과 달리 융통성이 없을 거란 오해도 많이 풀렸다. 오히려 다양한 계약조건을 가지고 있는 탄력적인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월-금 매일 8시간, 월-금 매일 12시간, 월-토 매일 8시간 등 근무조건이 다양하다. <네버 포에버>는 월-금 매일 12시간으로 계약했는데 그게 단순히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가 아니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콜 타임에 따라서 진행된다. 그러니까 아침 8시가 콜 타임이면 저녁 8시인 거다. 이준동 대표는 “사전에 준비를 철저히 하면 오히려 합리적인 시스템이다. 하여간 문서가 많더라. 참여한 스탭들이 일지를 쓰고 그것에 근거해 돈을 그 사람한테 주는 게 아니라 노조에게 지급하면, 노조 회계를 대행하는 회사가 그 서류를 받아 집행하는 식이다.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모여서 하나의 통일적인 시스템을 이루고 있다. 영화현장의 특수성이 잘 반영되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유은정 PD 역시 “단순히 현지 로케이션으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악명 높다는 미국 영화산업노조와 스크린액터스길드 시스템 내에서 무리 없이 제작한 첫 번째 한국영화”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네버 포에버>는 대부분 로케이션 촬영으로 진행됐는데, 촬영허가를 받는 순간 경찰이 동행해 현장통제 등 제반업무를 지원해주는 형태이기 때문에 보다 수월한 진행이 가능할 수 있었다. 

<네버 포에버>는 가장 인상적인 뉴욕 풍경이 펼쳐지는 한국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큰 고비는 오히려 시스템과 별개로 촬영 시작 전에 있었다. <네버 포에버>는 격정적인 사랑과 욕망을 다루고 있는 만큼 제법 많은 노출 신들이 포함돼 있다. 
할리우드에서는 촬영 이전 합의해야 하는 노출조항이 꽤 까다롭다. 하지만 크랭크인에 앞서 베라 파미가는 정면 노출 불가, 카메라가 엉덩이 밑까지 내려오는 것 불가 정도를 제외하고는 15페이지에 달하는 노출조항을 다 무시하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만큼 스스로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지나면서 자신을 상업적으로 팔아먹는 영화가 아닌가 하고 갑자기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색다른 형태와 시스템의 영화이기에 제작 도중 그가 느꼈을 애매함과 불안감을 짐작할 만도 하다. 그 즈음 영화는 꽤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지만 베라가 김진아 감독의 전작들을 보게 되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러한 오해는 말끔히 사라졌다. ‘한미 합작’ 영화라는 화두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영화 소프트웨어 그 자체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일화라 할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 한미 합작 사례라는 작지만 큰 발자국을 뗀 <네버 포에버>는 내년 초 관객들을 찾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