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아의 비디오 다이어리>(2001)와 로카르노국제영화제 초청작 <그 집 앞>(2003)을 만든 김진아 감독, 그는 현재 한미 합작영화 <네버 포에버>를 연출 중이다. 김진아 감독을 만나 <네버 포에버>에 대해 들어보았다.
<네버 포에버>는 남녀문제, 가족문제가 미국사회 내에서의 인종문제와도 겹치는 굉장히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모든 남녀관계, 또 모든 개인적인 관계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내에서도 남녀관계들 중 계급문제와 무관한 커플이 과연 몇 쌍이나 있을까? 다시 말해 이 영화를 특별히 인종문제나 이민자문제를 다루기 위해 '기획'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잘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 게으른 성향과 내가 원했던 열정적인 사랑이야기에 또 다른 레이어를 주게 된 것 같다.
당신의 이전 영화들과 비교하자면 가장 장르성이 강한 것 같다.
100퍼센트 멜로드라마다. 워낙에 꼭 영화뿐 아니라 근대극으로서 멜로드라마에도 관심이 많다. 영화 쪽으로는 더글라스 서크 같은 50년대 할리우드 멜로영화들의 팬이기도 하지만, 가장 자극을 많이 받은 것은 오히려 60년대 한국의 멜로영화들이었다.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영화들을 다시 보게 됐는데, 당시 극장 가는 것이 유일한 오락이었던 '아줌마'들을 위한 이 멜로물들이 얼마나 큰 전복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새삼 놀랐다. 그 가능성을 부활시켜 가장 멜로적인 형식으로, 가장 현대적인 주제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베라 파미가가 연기하는 소피는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가?
소피는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다. 원래 소피는 영화가 시작될 즈음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요구를 들어주고 실현해주는 것이 자신의 목표인, 그러나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모르는 여자다. 그러나 가난한 한국 이민자인 지하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역설적으로 자신의 욕망(삶 자체에 대한)을 재발견하게 된다. 베라와의 작업은 정말 즐거웠다. 작가이자 감독인 나보다 더 잘 소피를 이해한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소피의 작은 제스처들, 앞머리의 컬, 걷는 모습 하나까지도 같이 고민해 만들어낸 것들이다. 나는 배우를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캐릭터를 실현해줄 인형으로 보지 않는다. 반대로 배우에게 영감을 받고 배우가 가진 필모의 페르소나는 물론 자연인으로서의 매력까지도 적극적으로 영화에 사용한다. 베라는 이런 나의 성향을 무척 반가워했다. 또 베라를 만나고 난 후 베르메르와 모딜리아니, 드가, 파울라 모데르존 베커 등 화가들의 그림에서 영감 받은 소피의 이미지 메이킹 자료들을 보냈는데 그걸 소중히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
상대역인 하정우와 데이비드 맥기니스에 얘기해준다면?
하정우는 <용서받지 못한 자>의 영향이 컸다. 그를 탐내는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하정우에게는 연예인이 아닌 '배우'의 냄새가 난다. 그것도 최무룡 선생님이나 김진규 선생님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옛날 배우의 냄새 말이다.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주말을 끼고 하루 만에 답변이 왔다. 그 박력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배우를 어떻게 캐스팅하냐고 묻는 말에 '외모가 제일 중요해요'라고 말하곤 해서 사람들을 뜨악하게 만들고는 한다.(웃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모는 단순히 잘생기고 못생기고 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자연인으로서의 매력, 배우로서의 카리스마와 아우라, 또 영화의 배역에 맞게 자신을 만들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유연성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백지 같은 여백까지 있어야 한다. 데이비드는 연기 경력이 길지 않아 배우로서는 크게 입증된 바 없지만, 오로지 이미지와 가능성을 보고 결정했다. 내면연기가 필요한 힘든 역을 잘 소화해줘 고맙게 생각한다.
한국인, 미국에서의 생활, 그리고 이번과 같은 합작영화를 만드는 감독 등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평소 스스로 어떻게 규정하고 있나?
처음 베라를 만났을 때 베라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나리오를 보고 내가 한국남자와 결혼한 미국여자일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마 내 이름의 영문 철자 ‘Jina'가 영어로도 자연스럽게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10년 전 같았으면 그런 말에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소위 정체성 논의가 정점에 달하기도 했었고, 미국에 처음 유학 와서 아시아 여자라는 것에 대해 처음으로 자각했을 때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단순히 나는 나라는 생각을 한다. 일단 '나와 같은 무리'를 찾아 섞이기에는 너무나 많이 고립돼 있다. 하버드 시각예술 학부 교수 27명 중 유색인종은 나 하나다. 한국학생이 그렇게도 많은 하버드지만 예술 학부 전체에 한국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 미국영화계에서도 아시아 여성 감독은 거의 찾기 힘들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버리고 나니 오히려 편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여자라는 것, '결여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행복해져버린 까닭이다. 옛날에는 늘 생각했었다. “나는 이렇게 작은데 왜 내 한 몸을 편하게 뉘일 자리가 세상에는 없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늘 안정에 대한 그리움이 솟고 정착하고 싶을 때마다 존경하는 한 선배 언니가 하는 말처럼 ’어차피 위대함은 그들의 것이니까‘ 라고 속삭이고 훌훌 털고 일어난다. 이제는 정말 삶의 유목민이 된 것처럼. 지금은 그래서 편하다. 마초들이 판치고 백인들만이 우글대는 촬영장에서도 나는 촬영조끼보다 내 몸에 더 편하게 맞는 앞치마를 입고 일했다.
하버드에서 진행한 한국영화 강좌나 한국영화인들의 특강의 반응은 어땠나?
이상하게 그 한국영화 강좌가 매스컴을 타는 바람에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하는데, 사실 나는 한국영화를 가르치기 위해 하버드에 초청된 것이 아니고, 시각예술 학부에서 영화를 가르치기 위해 간 거다. 아직 한국인 학생이 없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버드에도 영화과가 있다. 그러던 중 한국감독이라는 이유로 한국영화 강좌까지 잠시 맡게 된 것이다. 그 강좌는 두 학기만 하고 영화작업과 강의를 병행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 그만뒀고 지금은 영화제작 강의만 하고 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한국영화를 가르쳤던 작년 가을을 되새겨 보면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학풍의 하버드 같은 경우 조심스러운 편이다. 임권택 감독, 김홍준 감독, 김동원 감독, 이재용 감독 등을 초청해 영화제를 열기도 했는데 거의 모든 상영이 매진이었다. 그게 벌써 1년 전이니 지금 한다면 또 다를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공공연한 한국영화광이고 베라는 그의 <디파티드>에 출연까지 했다.
베라 같은 경우 한국영화를 소문으로만 듣다가 한국영화광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덕에 시달리고 있는데,(웃음) 과장 하나도 안 하고 스콜세지는 거의 매일 베라에게 한국영화 DVD를 택배로 보내준다. 내가 같이 놀고 있을 때 받은 것만 해도 <질투는 나의 힘> <올드보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등 적어도 대여섯 개는 된다. 심지어는 베라가 스콜세지에게 하정우 자랑을 했더니, 스콜세지가 도대체 어디 나온 배우냐고 묻기에 <용서받지 못한 자>에 나왔다고 하자, 마침 그 영화를 보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비단 스콜세지뿐 아니라 한국영화가 여기 영화지식인들에게는 가장 핫 아이템인 것만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