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개봉하는 한·미 합작 프로젝트 1호인 ‘두 번째 사랑’은 내용부터 파격적이다. 애인을 위해 돈이 필요한 한국인 남자와 남편을 위해 아이가 필요한 백인 여성의 은밀한 거래. 그리고 시작되는 예기치 못한 사랑을 그린 멜로 영화다.
한국배우로는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숨’ 등에서 남다른 연기력을 보여준 하정우와 ‘디파티드’로 주목을 받은 베라 파미가가 주연을 맡았다. 미국의 유명 배우와 스태프가 참여한 작품임에도 한국적인 색깔을 유지하는 이유는 시나리오와 연출을 맡은 김진아 감독(34)이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서양화과 92학번인 그는 대학 졸업후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칼아트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현재 하버드대 시각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이력과 그간 연출한 작품의 면면을 보니 “어떤 사람일까?”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30대 중반을 넘어서 늙어버렸다고 했지만)감독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가녀리고 여성스러운 외모를 지닌 김진아 감독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여성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중성적인 이미지이거나 괄괄한(?) 성격을 떠올리게 하는데. 의상을 보면 꼭 배우 같은 느낌이 든다.
(웃음)여성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기는 한다. 항상 부드러운 것은 아니다. 촬영장에서 한번 큰 소리를 낸 적이 있다. 한국적인 느낌을 영상에 담으려고 다기를 준비하라고 스태프에게 말했는데. 모두 미국 사람들이라 구분이 안 됐던 지 중국산을 들고 왔다. 감독이라고 해서 꼭 어떤 스타일이어야 한다는 정의는 없는 것 같다. 감독은 배우나 스태프가 최적의 상태에서 촬영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
미술을 전공했던데. 영화 연출을 하게 된 동기는?
설치예술. 비디오. 퍼포먼스. 연극 등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감독의 길은 생각지 못했다. 대학교 4학년 때 비디오 매체를 접했고.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이 왔다. 비디오는 사적인 얘기를 공적으로 만들 수 있는 매력적인 매체다. 내가 여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자각에 예민해져있던 시기라. 비디오 촬영을 통해 자아를 표현했다. 그 대표작이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다. 내 알몸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고. 아무튼 이후의 작품들이 해외 국제 영화제에 소개됐다. 곳곳의 영화제에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감독의 길로 접어들었다. 씨앗은 작았지만.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얽혀 지금의 내가 생겨났다.
‘두 번째 사랑’은 왠지 자전적인 내용이 들어 있을 것 같다.
아니다. 여주인공인 베라 파미가도 같은 얘기를 했다. 시나리오를 본 뒤 첫 미팅을 할 때 베라가 동양인인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영화처럼 동양계 남자와 살고 있는 외국 여성감독이라고 생각했단다. 소설의 주인공은 자기의 실험적 자아다. 영화나 시나리오를 통해 판타지를 펼쳐 보이고 싶은 생각이 들때가 있다. 난 평범한 한국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릴적부터 스스로 소설의 주인공이 되려고 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공상을 하면서 로맨스를 꿈꿨다. 팝스타. 위인. 철학자들과의 사랑을 상상하기도 했다.
영화의 결말(남자 아이와 임신을 한 베라 파미가만이 홀로 등장한다)을 보면 허무하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나름대로 의미가 담겨 있다. 기본적으로 지하(하정우)와 잘 됐다는 것을 암시한다. ‘두 번째 사랑’은 멜로영화이면서 한 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파멸한 뒤 오직 사랑 하나만을 위해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다.영화 끄트머리를 보면 아들이 물고기를 바다로 돌려보내는 신이 나온다. 그때 베라가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라는 대사를 한다. 자기 몸에 맞지 않는 곳에 있던 물고기가 드디어 자신의 몸에 맞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공동 제작을 맡은 이창동 감독과 김진아 감독의 영화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관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창동 감독과 나는 ‘세상에 이야기는 10가지 밖에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연인의 사랑. 영웅인지 몰랐다가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 원수의 진한 복수 등등. 영화는 표현의 영역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 감독님과 나는 그 표현의 방식으로 불편하리만큼 사실적인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얼마전 니콜 키드먼. 톰 크루즈 등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와 샘 레이미. 마이클 만 등 스타 감독을 보유한 최고 에이전시인 CAA와 계약을 체결했던데….
어쩌면 자만하는 것처럼 보여 얘기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웃음) 기본적으로 인연이 닿았던 게 중요한 것 같다. 성공한 면면만 봐서 그렇지 힘들었던 적도 많았다. 기획했던 작품이 잘되지 않았던 경우도 있고. 시나리오 때문에 며칠 밤을 홀로 방에서 고민했던 적도 있다.
두번 째 사랑’이후 차기작이 궁금하다.
이미 파라마운트와 계약을 했다. 이번에는 심리 스릴러물을 할 예정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다. 어쩌다 보니 미국에서 작업을 하게 됐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에서 영화를 하는 것이다. 우연히 미국의 메인스트림에서 일하게 된 덕분에 할리우드 시스템을 많이 알게 됐지만. 정작 이곳에서 한인 커뮤니티에는 속하지 못한 것 같다. 재미교포 사회도 잘 모르고…. 외국에 있다 보니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정체성 등을 더욱 갈망하게 된다. 뭔가 사무치게 한국적인 것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