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화감독이라고 하면 혹시 풍채 좋고, 입담 좋은 아줌마거나 머리 짧고 중성적인 외모가 떠오르는가? 21일 개봉한 <두번째 사랑>의 김진아(35) 감독은 이런 선입견에서 벗어나 있다. 여성스럽고 젊으며, 체격도 왜소하다. “여자감독이먼 덩치 크고 연륜이 있다고 으레 생각하죠? 그래서 한때 군인처럼 머리를 깎기도 했는데. 그리고 저 젊은 감독 아니에요. 오히려 늦었죠. 남자 감독들 대부분 20대부터 활동하고, 주목받잖아요. 삼십이 훌쩍 넘었는데….”
김진아. 그의 이름이 국내에서는 생소하지만,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신세대 감독이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동안 자신의 일상을 담은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 <그 집 앞> 같은 다큐멘터리를 선보여 각종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얼마 전 니콜 키드먼, 톰 크루즈 등 할리우드 배우와 샘 레이미, 마이클 만 등의 스타감독을 보유한 최고의 에이전시인 시에이에이(CAA)와 계약을 체결해 화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 하버드대 시각예술학부 교수다.
그가 처음으로 도전한 상업영화 <두번째 사랑>으로 시험대에 오른다. 한미합작으로 만들어졌는데, 국내에서 먼저 개봉하게 됐다. “평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에요.” 19일 만난 김감독에게선 자신감이 배어났다. 각각 <디파티드>와 <용서받지 못한 자>로 미국과 한국에서 뜨고 있는 베라 파미가와 하정우가 주인공으로, <밀양>의 이창동 감독이 제작자로, <피아노>의 마이클 니만이 음악감독으로 나섰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두번째 사랑>은 “섹스를 두고 거래를 시작한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는 뻔한 설정에서 시작한다. 그렇다고 하룻밤 대가로 100만달러를 받고 아내를 빌려주는 <은밀한 유혹>(1993)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다. 이 진부한 소재에서 그는 ‘여성의 삶과 행복’이라는 주제를 끄집어냈다. 올해 초 선댄스영화제에서도 “여성의 심리묘사가 간결하면서도 섬세”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주인공 소피(베라 파미가)는 임신능력이 없는 남편에게 아이를 안겨주려고 외모가 닮은 한국인 청년(하정우)에게 ‘한번에 300달러, 임신하면 3만달러’라는 위험한 거래를 제안한다. 섹스의 주도권 역시 소피가 쥔다. 소피는 남편에게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울며 매달리지 않는다. 안나 카레리나처럼 기차에 몸을 던지지도 않는다. “누구와 맺어졌든, 그가 원하는 삶과 행복을 스스로 찾았다는 게 중요하니까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김 감독은 이 영화의 영감을 그가 존경하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서 받았다고 한다. “<씨받이>는 남성적 시각에서 그려진 영화잖아요. 대를 잇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씨받이가 되고, 아이를 뺏긴 씨받이는 절규하다 자살하는 것이요. 여기에서 여성이 선택하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잖아요. <두번째 사랑>은 철저하게 <씨받이>와 대립되는, 색다른 시각을 가진 여성영화로 봐주셨으면 해요.”
<두번째 사랑>은 과연 누구의 이야기에 가까울까? 김감독의 이야기는 아니다. “베라가 저를 처음 봤을 때 ‘자기 얘기’라고 하더라구요. 실제 베라는 모든 것을 가진 남편과 잘 먹고 잘 살다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경험이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영화가 더 빛났죠.”
다음 작품은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하는 심리 스릴러물 <더 젤러스 원>(가제)이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과 영화를 찍는 일을 하는 게 거의 ‘살인적 스케줄’이라고 한다. “8월부터는 교수직을 접고 감독만 할 겁니다. 시나리오 작업 중인 차기작은 이웃에 사는 두 여자가 서로 질투하면서 벌어지는 심리게임을 다뤄요. ‘여자가 원하는 게 무엇일까’를 탐구한다는 면에서 <두번째 사랑>의 연장선이겠네요. 그동안 미국에서 주로 작업을 했는데, 제의만 온다면 언제든지 한국에서 작품을 만들 겁니다.”